최보영의 마음공감

  • 등록 2025.05.13 21:41:55
크게보기

그저, 하루를 통과하는 중입니다


“어떤 날은 세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 마음의 생존 방식이 된다.” 신경과학자 올리버 색스의 이 말은, 아마도 나처럼 말없이 하루를 견디는 이들에게 남겨진 문장일 것이다. 나는 이 문장을 오늘 아침 여러 번 곱씹었다. 커튼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데도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손을 뻗어 커피포트를 누르려다 말았고,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오늘 너무 무기력해”라고 말하려다 그마저도 멈췄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오늘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는 대개 활력 있는 상태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무기력은 결함처럼 여긴다. 무언가를 끌어내야 하는 날, 감정이 멀게만 느껴지는 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그런 날이 찾아오면 우리는 조바심을 느끼고,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날이야말로 내면이 고요히 신호를 보내는 시간일 수 있다. 감정도 과열되면 탈진하고, 마음도 자주 움직이면 피로해진다. 몸이 신호를 보내듯 마음도 자기만의 피로 언어를 가질 수 있다면, 그 언어는 아마도 ‘무기력’일 것이다.

 

무기력한 하루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나도 한때는 그런 날을 ‘하루를 망쳤다’고 표현했고, 자신에게 실망하며 억지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살다 보면 결국 알게 된다. 무기력은 나약함이 아니라 정직함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감정을 다 태운 사람, 할 만큼 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조용한 휴지기 같은 것이다. 감정의 소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만큼 회복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이제 그런 날을 ‘기다리는 시간’이라 부른다.

 

우리는 매일 과하게 반응하며 살아간다. 알림에 반응하고, 메시지에 답하고, 끊임없이 나를 설명하며 살아간다. 그런 반복 속에서 어느 순간, 자신을 놓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무기력은 삶이 우리를 잠시 바깥으로 데려가려는 시도일지 모른다. 세상과 거리를 두는 그 며칠은 결코 손해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다시 복원하는 가장 필요한 시간이 된다. 살아가는 데도 정비가 필요하다면, 무기력은 그 첫 단계가 아닐까.

 

무기력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내면이 스스로를 정리하고 회복하는 밀도 높은 작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 복잡한 감정노동이다. 오늘 하루를 멈춘 사람은 어쩌면, 가장 많은 것을 끌어안고 있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날엔 나 자신에게 허락이 필요하다.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당장은 움직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조금은 지쳐 있어도 괜찮다고.

 

나는 오늘도 아무것도 쓰지 못할 줄 알았다. 칼럼 마감이 다가오는 토요일인데도, 문장은 한 줄도 떠오르지 않았고,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나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나는 살아내는 중이다’라는 말을 조용히 되뇄다. 무기력한 하루는 어쩌면, 내 삶에서 가장 정직한 하루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나는 오늘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버티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기력은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다. 살아가는 일의 일부다. 언젠가 그런 날들이 지나가고 나면, 나는 그 시간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내가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 나를 지키기 위해 멈췄다는 것, 그리고 그 하루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 무기력했던 날도 분명히 삶의 일부였고,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다.

 

내일은 다를지도 모른다. 혹은 여전히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을 무사히 통과한 나에게 나는 이렇게 말해주기로 한다. “오늘도 잘 버텼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게 오늘의 전부였어도 괜찮아.” 아무 일도 하지 못한 하루에도 분명히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최보영 작가

경희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석사
UM Gallery 큐레이터 / LG전자 하이프라자 출점팀
 
[주요활동]
신문, 월간지 칼럼 기고 (매일경제, 월간생활체육)
미술관 및 아트페어 전시 큐레이팅

 

[수상경력]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대한민국경제신문]

관리자 기자 eduladder@naver.com
Copyright @대한민국경제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