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잔 속에 담긴 작은 역사와 성숙의 향기
사람은 성숙해지며 취향이 변한다. 이는 비단 음식이나 옷차림뿐만 아니라, 술에서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처음 맛본 술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면, 나이가 들수록 술은 삶의 순간을 기념하거나 나만의 여유를 찾는 특별한 순간으로 자리 잡는다. 와인이 바로 그런 예가 아닐까.
우리 집은 종가라서 매달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나면 ‘음복’이라 해서 제사상에 올렸던 음식을 나눠 먹고, 술을 조금씩 입에 대는 의식이 있었다. 숙부는 어린 나에게도 작은 잔을 내밀며 술을 맛보게 했는데, 그게 꽤 설렜다. 어른들 틈에 끼어 마신 정종의 맑은 향과 묘한 쓴맛은 아직도 기억난다. 아마 그때부터 술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분위기와 순간을 함께하는 특별한 무언가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대학생이 되고 처음 친구들과 환영회를 하며 술자리에 나갔다. 그때 마신 폭탄주의 맛은 기대와 달리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던 그 시절의 술자리는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지만, 그저 신기하고 낯선 경험이었다. 그런 경험이 쌓여가면서 술이 취미가 아닌, 나만의 취향과 순간을 위한 특별한 즐거움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와인, 역사와 함께하다
와인은 고대부터 이어져 온 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에 원나라를 통해 포도주가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왕실에서 귀하게 여겼던 포도주는 이후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금씩 대중에게 알려졌고, 지금은 그 종류와 맛도 다양해졌다. 와인은 이제 단순한 음료를 넘어 사람들의 취향을 담은 생활문화로 자리 잡았다.
와인은 한 모금 마시는 것만으로도 깊이 있는 시간을 느끼게 한다. 각각의 병에 담긴 와인은 각기 다른 토양과 기후에서 자란 포도로 만들어지며, 오랜 시간 숙성 과정을 거친다. 와인 잔을 들고 색을 보고, 향을 음미하며 천천히 맛보는 그 과정은 마치 잔 속에 담긴 시간과 자연, 그리고 사람들의 노력을 느끼게 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맛과 향으로 즐기는 성숙의 미학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한 모금을 삼키는 것이 아니다. 와인은 시간이 지나며 변하는 맛을 지닌 독특한 술이다. 한 잔을 들고 향을 맡으며, 입안에서 천천히 굴려보면 와인 속에 담긴 복합적인 풍미가 느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고 내 경험이 쌓일수록 그 의미도 달라진다.
어릴 때는 정종의 맑은 맛을 신기해했다면, 이제는 와인의 무게감과 깊이가 마음에 와닿는다. 처음엔 달콤하고 마시기 쉬운 화이트 와인부터 시작했지만, 점점 레드 와인의 깊이와 묵직한 맛을 찾게 되었다. 마치 내 취향도 와인과 함께 변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맞는 와인을 찾는 즐거움
와인은 다양한 감각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끈다. 처음엔 달콤하고 가벼운 와인이 좋았지만, 와인의 세계에 깊이 발을 들여놓다 보면 무겁고 진한 레드 와인의 매력도 알게 된다. 깊은 바디감과 묵직한 향이 주는 편안함은 나이가 들수록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와인은 그 과정을 통해 내 취향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히 한 잔의 음료일 수도 있지만, 와인은 성숙해 가는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와인과 함께하는 작은 행복
와인은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술이기도 하지만, 소소한 행복을 찾고 싶을 때도 좋은 동반자가 된다. 예전에는 거창한 기념일에만 와인을 열었지만, 이제는 일상의 작은 순간에도 와인을 곁들인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와인을 한 잔 따를 때, 그 순간의 여유가 삶에 작은 행복을 더해준다. 어쩌면 와인을 마시며 나 역시 와인처럼 익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내 앞에 한 잔의 와인이 놓인 순간, 어린 시절 음복으로 맛본 정종처럼 지금의 내 삶을 음미하고, 순간을 기념하는 작은 여유를 즐기게 된다.

[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