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에스켈레이터, 멈춰.
세 자매는 나란히 이국의 땅에 발을 내디뎠다. 열네 시간 남짓 공중에 떠 있는 동안 맏이인 언니는 긴장을 놓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아들이 해외 근무차 떠나온 지 벌써 3년 차. 아들과 손자를 만나는 여정은 기내에서 하룻밤을 고스란히 보내고도 피곤한 줄 모르는 듯했다.
언니는 평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언니 아들이 초청한 효도 여행으로 두 이모도 동행했다. 여행은 설렘과 낭만에 가득 찼다. 과연 그러할까?
“야~! 내 발이 땅을 딛고 있는지, 하늘에 떠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듬직해진 열 살의 손자를 데리고 나온 조카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겼다.
언니는 낯선 곳에서 만난 아들이 대견한 듯 무척 기뻐했고, 사랑하던 손자를 힘껏 껴안았다.
“할머니, 아파요!”
이튿날 이른 아침, 일찍 출근한 조카와 점심 식사 약속으로 회사 근처 기차역으로 갔다. 외출 나온 조카를 만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하면서 두 자매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언니의 표정에 덩달아 행복감이 올라왔다.
만개한 꽃처럼 화사한 모습! 어젯밤도 지새운 여독은 찾아볼 수가 없다.
3년 전, 해외 근무 소식에 언니가 한동안 우울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에스컬레이터가 중간쯤 올랐을 때였을까? 순간 “어~” 하더니 언니가 물구나무 자세로 반듯이 드러누웠다. 에스컬레이터에서 어찔하더니 넘어진 것이다. 가파른 경사로에 움직임이 끔찍했다. “헬프 미”만 외쳤다. 누군가가 스위치를 눌러 멈췄다.
“엄마, 엄마아~” 조카는 큰 소리로 흐느꼈다.
언니는 의식을 잃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떠지지 않는 눈과 뻣뻣한 팔다리, 나는 정신 없이 언니 몸통을 두드렸다. 멈춘 심장이라면 뛰게 해야지.
언니 혼자 만이 아니었다.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조카의 구두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게 아닌가? 정강이가 쇳덩이에 부딪혀 찢어졌는데 본인은 통증조차 인식할 겨를이 없었다. 경사로에 굴러 내리는 2차 사고를 당할까 봐 자신의 다리로 엄마의 무거운 몸을 견제한 것이다.
구급차가 병원에 도착했고 종일 검사했다. 다행히 언니는 의식을 찾고 늦은 밤, 안전하게 귀가해 돌아왔다. 먼 이국땅에서 닥친 일은 우리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다. 평생 처음 해외여행으로 엄마를 초대한 아들과 우리 가족에게 감당하지 못할 일이 될 수 있던 날이었다.
참으로 인생, ‘호사다마’라더니 평소에 당연하게 무심코 오르내리던 일이 예사가 아닌 것이 되었다. 또 설렘과 낭만으로 가득 찬 여행에는 예측 불가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었고, 매 순간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해야만 한다.
여행지 첫날, 우리는 사고를 당한 놀람이 매우 컸으나, 다시 찾은 생명으로 안도했다. ‘엄마’,‘언니’,‘할머니’가 다시 살아났으니 천천만만 감사한 일이 아닌가.
여행은 삶의 현장을 비추는 거울이다. 효도도 그러하다. 조금만 더 좋은 날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해외에 있는 이 순간에도 함께하는 것이다. 그저 낭만이고, 마냥 즐거운 것만도 아니지만 차후로 미룰 일도 아니다.
조카는 자기 온몸으로 엄마를 안전하게 보호했다. 본능으로 지켜냈다. 효도는 부모가 좋아하는 것과 단순히 잘해 드리는 것을 넘어 본능적으로 안전하게 지켜내는 것이었다. 여행을 통해 가족이란 죽음도 불사할 일에 뛰어들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당연했던 관계가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늘도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이용자 모두가 가족 같다. 안전하고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용하지만, 그때의 일은 내 몸이 기억하게 만들고 때로는 두렵게도 한다. 안전거리 없이 움직이는 쇳덩이 물체를 보면 아찔해진다. 몸이 불편한 분이나 어르신들은 엘리베이터를 꼭 이용하라고 말하고 싶다. 젊은이들은 손잡이를 잡고, 스마트 폰을 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가면 좋을 듯. 생명은 소중하고, 인생은 여행이다.
홍헬렌송귀 작가
마음공감 코칭 & 심리상담센터장
학력 : 칼빈대학교대학원(심리상담치료학,상담학석사)
경력 : 현)한국푸드표현예술치료협회 이사 /분당노인종합복지관 상담사/ 용인시 교육지원청 학생삼담
저서(공저) : [자존감요리편 10인10색마음요리2] [시니어강사들의 세상사는 이야기]
[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