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영의 마음공감

  • 등록 2025.03.26 21: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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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쩌라고요?


살다 보면 마음이 툭, 하고 접히는 순간이 있다. 말 한마디, 그저 흘려듣자니 묘하게 거슬리고, 되묻자니 체면이 어색해지는 그런 순간. 가만히 앉아 듣고 있다 보면, 내 안에 조용히 단단해지는 선이 생긴다. 이 관계는 여기까지, 라는 작은 결심과 함께.

 

 

나는 나름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다.

적어도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에게는 더 따뜻하게 대하고 싶다. 굳이 감정의 불편함을 키우기보다는, 가능한 한 다정하게 마주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택해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나를 존중할 때의 이야기다.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나는 약한 사람에게는 부드럽지만, 강한 척하는 사람 앞에서는 어느 순간 단호해진다.

조용히 듣고 있다가도,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나 태도를 마주하면, 내 안의 선이 단숨에 곧아진다. 평소엔 알아채지 못하던 나의 단단한 면이, 바로 그런 순간에 얼굴을 드러낸다.

 

얼마 전, 아이의 학업 문제로 상담을 받기 위해 어떤 선생님을 만났다.

신뢰하던 지인의 소개였기에, 나름의 기대를 갖고 방문한 자리였다. 처음에는 차분하게 이야기가 오갔고, 아이의 상태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조언도 이어졌다. 그런데 대화의 흐름과 무관하게, 선생님은 그 지인에 대해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분의 배경이나 사회적 위치, 주변 정보들이 은근하게, 그러나 분명히 강조되었다.

 

물론, 그것이 내 아이의 진로에 도움이 되는 정보였더라면 다르게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들은 어쩐지 나에게 유익한 정보라기보다, 누군가를 통해 본인을 간접적으로 높이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더불어, 그 정보를 안다는 것이 곧 내가 놀라야 할 이유인 것처럼 암묵적인 기대마저 엿보였다.

 

순간 마음이 조용히 식었다.

무례하지는 않았지만 세심하지도 않았다. 유려하게 포장된 말들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의도는 뻔히 느껴졌고, 나는 그 자리에서 그 사람의 방향성과 나의 방향성이 다르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었다.

나는 여전히 그 선생님을 소개해준 지인에게 고마운 마음뿐이다. 좋은 뜻으로 연결해주셨다는 걸 알기에, 그 인연을 오래 이어가지 못한 것이 오히려 미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만남은 나에게 어떤 경계선을 다시 한번 그어주는 경험이 되었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던지는 말에서 모든 게 드러난다.

아무리 세련되게 감추려 해도, 결국 어떤 사람인지는 태도와 분위기, 그리고 작은 말 한마디에서 읽히게 된다.

진짜 괜찮은 사람은, 자신이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짜 좋은 사람은, 굳이 보여주려 하지 않아도 그 따뜻함과 중심이 전해진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더 자연스럽고 단단한 관계 안에 머물고 싶다.

서로의 가치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인정할 수 있는 사람, 겉모습보다 본질을 먼저 들여다보려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말의 힘을 아는 사람과 오래 가고 싶다.

 

모든 인연이 오래 지속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아주 짧은 순간, 문득 떠오른 “그래서, 어쩌라고요?”라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그 인연의 온도와 방향을 판단할 수 있다.

 

나는 오늘도 내가 지키고 싶은 태도와 함께,

내가 머물고 싶은 사람들 곁에 조용히 머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관계 안에서, 그렇게 조금 더 단단해지고 싶다.

 

 

 

최보영 작가

경희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석사
UM Gallery 큐레이터 / LG전자 하이프라자 출점팀
 
[주요활동]
신문, 월간지 칼럼 기고 (매일경제, 월간생활체육)
미술관 및 아트페어 전시 큐레이팅

 

[수상경력]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대한민국경제신문]

관리자 기자 eduladd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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