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결, 사람의 품
말은 언제나 사람을 드러낸다.
어투보다 의도가 먼저 느껴지는 순간이 있고,
단어보다 결이 먼저 다가오는 말들이 있다.
그 결은 종종 그 사람의 마음을 닮는다.
최근 들어, 말을 듣는 일이 부쩍 피로해졌다.
의미 없는 말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심한 척 흘려지는 말, 정확히 무엇을 겨냥했는지 애매한 말,
감정은 담기지 않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찔리는 말들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그런 스타일은 요즘 잘 안 쓰지 않나?”,
“그거 예전에 누가 했다가 잘 안 됐다고 들었어요.”
“요즘은 좀 더 세련된 쪽이 좋지 않나 싶네요.”
말은 직접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엔 분명한 뉘앙스가 깃들어 있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 굳이 지목하지 않아도,
그 말이 방 안의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듣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둔다.
말을 내뱉은 사람보다, 그 말의 결이 먼저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단어보다 결에 반응한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이는 부드럽게 들리고,
어떤 이는 어딘가 날이 서 있다고 느껴진다.
“괜찮아요”, “고생하셨어요”, “그럴 수도 있죠.”
이 짧은 말들조차도, 어떤 마음에서 나왔는지에 따라 온도가 달라진다.
결국 말의 결은, 마음의 결이다.
말은 단지 소리나 문장이 아니라, 태도와 결을 포함한 사람 전체의 흔적이다.
품이 있는 사람의 말은 서두르지 않고, 요란하지 않으며, 듣는 이의 입장에서 한 번 더 걸러진다.
조용하지만 묵직하고, 짧지만 오래 남는다.
그런 말은 말투가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
반면, 피로하게 만드는 말들도 있다.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비교를 끼워넣고,
칭찬을 하면서도 어느새 경쟁의 잣대를 들이대며,
관심인 듯 무심한 척하면서도, 감정을 흘려보내는 말.
그 말은 듣고 있는 도중에 이미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불쾌하진 않지만 분명히 거슬리고,
그 사람이 가진 말의 결은 그 순간 드러난다.
그럴수록 생각하게 된다.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
내가 던진 말이 누군가에겐 쉽게 잊혀졌겠지만,
누군가에겐 이유 없이 오래 남았을지도 모른다.
말을 많이 했던 시절이 있다.
진심은 오히려 말의 양에 묻히고,
상대의 반응보다 내 속도를 우선했던 날들.
지금 돌이켜보면, 말이 먼저 앞서고 마음은 뒤따르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말을 아끼는 쪽을 택한다.
하지만 그건 침묵을 위한 절제가 아니라,
말에 품을 더하려는 노력이다.
하고 싶은 말보다 해도 괜찮은 말을 고르고,
위로보다 무게 있는 침묵을 배운다.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는 말은 유창함이 아니라 결이라는 걸,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있는 사람이 더 오래 기억된다는 걸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알게 된다.
나는 이제,
어떤 말을 하느냐보다 어떤 말로 기억되는 사람이 될지를 고민한다.
말은 결국 흘러가지만,
그 결은 듣는 이의 마음에 오래 남는다.
그 결이 따뜻하고 단정하길 바란다.
그것이 나라는 사람의 품을 대신 설명해줄 테니까.
최보영 작가
경희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석사
UM Gallery 큐레이터 / LG전자 하이프라자 출점팀
[주요활동]
신문, 월간지 칼럼 기고 (매일경제, 월간생활체육)
미술관 및 아트페어 전시 큐레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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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