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성탄절이 지난 거리엔 여전히 캐롤이 흐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설렘이었던 그 음악이 이젠 조금 쓸쓸하게 들린다. 겨울은 항상 그런 계절이다. 찬 공기와 반짝이는 불빛이 겹쳐질 때, 오히려 마음은 더 고요해지고, 더 멀어진다. 올해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애썼다. 회사의 구조조정 앞에서 매일 출근이 두려웠던 사람, 막연한 불안을 견디며 진로를 고민한 청년들, 그리고 아이의 수험표를 붙잡고 지금도 결과를 기다리는 부모들. 누구는 삶이 휘청이는 시간을 버텼고, 누구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하루를 넘겼다. 반짝이는 뉴스보다, 그저 조용히 하루를 견디고 있었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특별한 이정표도, 눈에 띄는 성과도 없었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한 해였다. 누군가에게 2025년은 ‘무언가를 이룬 해’일 수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2025년은 ‘무너지지 않고 버틴 해’일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까지 도착한 우리는, 그 자체로 충분히 잘한 거다. 새해는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에겐 아직 이 해의 마지막 며칠이 남아 있다.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보다, 조용히 한 해를 쓰다듬는 일부터 시작
당신의 기쁨은 무엇인가요?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섭니다. 아직 어둠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늘 한편에는, 자라지 않은 손톱을 자른 것처럼 얇은 초승달이 가만히 떠 있습니다. 달이 차오르는 모습을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저렇게 지고 있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올해도 다 가고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다사다난했던 해라고 말하는데 저에게도 올해는 유독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이 해에 있었던 많은 일이 희미한 사진처럼 때로는 선명한 영상처럼 흐르듯 지나갑니다. 아프고 슬펐던 기억도 있었지만, 감사하고 행복했던 추억이 더 많은 듯합니다.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자극에 물들어 있는 요즘 사람들, 저로서는 그 감정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휘발되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기쁨에 대해 알게 되고 경험했던 한 해이기도 했던 거 같아요. 특히 그 가운데 하나는, 부족함을 느끼고 가끔 힘에 부치지만 글쓰기의 기쁨을 배우고 있는 겁니다. 물론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기억되네요. 그래도 글을 쓰며 좋았던 것은, 제 마음의 감정정리가 유연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위안을 주기도 했고요. 간혹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어느 때는 안개 낀
공감 –친절-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습니다. 임신 중 산부인과 진료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간호사가 환자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아기 엄마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백일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기를 달래고 있었고 진료실로 들어갈 때, 잠시 아기를 맡길 곳을 찾는 듯 보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먼저 진료받았고, 간호사는 또다시 몇 차례 그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옆에 계시던 한 아주머니가 조용히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아기 봐주실 분이 없으신가 봐요? 진료받으시는 동안 제가 안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진료 보고 나오세요." 그제야 그녀는 아기를 조심스럽게 낯선 아주머니께 맡기고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3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합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걸까요? 간호사에게 잠깐이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리고 아무리 선한 마음을 받았다 하더라도 백일도 안된 아기를 낯선 이에게 맡기는 것이 정말 괜찮은 일이었을까요? 세월이 흐르면서 느껴집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연이
상처를 다시 부르지 않는 법 우리는 누구나 말하지 못한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산다. 돌아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일인데, 이상하게 오래 남아 마음 한 켠을 붙잡는 기억들. 누군가의 가벼운 말 한마디, 이해받지 못했던 순간, 그 나이의 우리로서는 버겁기만 했던 관계의 무게 같은 것들. 그 상처를 준 사람들은 이미 그 사건을 잊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 느꼈던 수치심과 위축, 혹은 너무 어려서 표현하지 못했던 억울함이 아직도 마음속에 작은 그림자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오래된 그림자는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말라붙어 어떤 순간에는 내 선택을 막고, 관계를 흔들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까지 흐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상처를 다시 파헤쳐 누군가에게 이해를 구하고, 사과를 받아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들이 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내가 이해해 주는 것’일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작고, 훨씬 어렸다. 말을 잘하는 법도 몰랐고, 거절하는 법도 몰랐고, 상황을 해석할 힘도 없었다. 그저 버티
까치와 나무, 그리고 행복의 조건 늦은 출근을 했습니다. 이미 도로는 차로 가득하고 느리게 움직입니다. 신호대기를 위해 멈춰 선 후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봅니다. 차도 건너편 마른 잔디밭 위에, 앙상한 가지를 부챗살처럼 펼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옵니다. 텅 빈 나뭇가지들 사이로 새 두 마리도 보이고요. 서로 다른 가지 위에 앉아있어서, ‘쟤네 둘은 서로 친하지 않나 봐.’라며 조용히 혼잣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걸까요? 제 생각이 틀렸다며 보란 듯이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한 쌍이 날아와 나뭇가지를 차지합니다. 하얀 가슴을 내밀고 긴 꼬리를 뽐내는 것을 보니 까치인 거 같습니다. 아마 그 나무에서 새들은 잠시 쉬어가려나 봅니다. 사실 저는 얼마 전 SNS에 올려진 ‘행복의 조건 6가지’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3가지나 5가지처럼 딱 떨어지지 않고 6가지라서 더 시선이 갔습니다. 글 쓴 분이 생각하는 첫 번째는 ‘친구가 있다’였고, 여섯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였습니다. 우정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마무리한 그 글을 예전에는 흘려 읽었습니다. 그런데 까치와 나무의 모습이, 행복에 필요한 조건에 대한 그 글의 처
공감 -콤플렉스- 당신의 콤플렉스는 무엇입니까? 사춘기가 되면서 콤플렉스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단체생활을 하면서 성적부터 키로 자리 순서를 정하는 일까지,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단체생활보다는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늘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콤플렉스도 사라져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열등감은 외부에 집중할 때 생겨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가족과 함께 ‘주토피아’ 영화를 보았습니다. 주디 홉스(토끼)와 닉 와일드(여우)가 주인공입니다. 주디 홉스(토끼)는 주토피아 최초의 토끼 경찰관이며, 닉 와일드(여우)는 사기꾼에서 주디 홉스(토끼)의 파트너 경찰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겉으로 보이지 않는 문제를 파헤치며, 관계의 발전과 사회적 성장을 그려냅니다. 그들은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서로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둘은 공격하거나 상대를 자신에게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성향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며, 배려와 우정으로 다름을 인정합니다. 닉 와일드(여우)가 조용히 말합니다. “여긴 아무도 자기 자신을 설명하려
삶의 기준을 낮추는 용기 우리는 이상하게도, 스스로에게만큼은 늘 높은 기준을 들이댄다. 남에게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에게는 항상 더 잘해야 한다고 하고, 더 열심히 라라고 하고, 더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을 놓지 못한다. 마치 조금만 느슨해져도 금방 무너져버릴 듯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정말 문제는 기준이 높은 게 아니라, 그 기준을 매일 지켜야 한다고 믿는 나의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기준이 잘못된 건 아니다. 그 기준을 지키지 못하는 날을 용납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 문제다. 삶이란 결국 ‘지속’이 만들어내는 힘인데, 우리는 그 지속보다 완벽함을 먼저 챙기려 한다. 그래서 조금만 흐트러져도, 잠깐 멈춰도,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실망한다. 그러다 지쳐버리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데도 말이다. 말 그대로, 완벽해야 한다는 마음이 오히려 삶의 지속을 방해하는 역설적인 순간이 오는 것이다. 기준을 낮춘다는 것은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준을 조절하는 일은, 내가 삶을 오래 버틸 수 있도록 마음의 숨구멍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게 아니라, 오늘의 내가
새롭게 보기를 연습합니다 퇴근 후 운동하러 갑니다. 제 앞에서 인도 쪽으로 큰 가지를 뻗은 단풍나무가 시선을 끕니다. 풍성한 단풍잎은 하나하나 자기만의 색을 뽐내며 눈부시게 일렁입니다. 하늘과 가까운 잎들은 진한 빨간색으로, 그 아래는 주황색으로, 기둥과 가까울수록 노란색으로, 색의 농도가 변하고 있습니다. 황홀한 그러데이션을 이루고 있는 단풍잎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 옆을 지나가다가 뒤돌아섭니다. 그러자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붉디붉은 단풍 위로, 한 뼘쯤 되는 곳에 조금 볼록해진 반달이 낮게 떠 있습니다. 아직 어둠이 찾아오지 않아서인지 빛나기보다는 하얗고 조용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초승달을 본 게 얼마 전인데 벌써 저렇게 달이 차오르고 있네요. 최근에 저는 무심히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작은 기쁨을 찾고 오늘의 감사에 다가설 수 있는 ‘나 혼자 챌린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한순간만이라도 잠시 멈춰서서 새롭고 낯설게 세상을 보기로 한 겁니다. 그리고 방금 그런 순간을 만난 거지요. 황홀하면서도 경이로운 시간, 마치 제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형언할 수 없었던 시간 속에서 저는 챌린지에 성공했다며 옅은
공감 -어른이 되어 알게 된 무게- 길을 걸을 때 떨어진 낙엽 밟는 소리가 정겹게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낙엽 소리가 분주하고 서글프게만 느껴집니다. 내 마음이 무거워서일까요? 어른이 되고 나서야 그 무게를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 편안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가족을 챙기며 먹고 살 경제력을 갖춘다는 것이 얼마나 큰 책임인지,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는 일도 얼마나 벅찬 일인지를요. 어렸을 때는 그저 당연한 일상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하루하루 지켜내야 할 소중한 것들이 되었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잠드는 밤, 가족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식탁, 사랑하는 이들의 평온한 일상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노력과 희생 위에 세워진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왜 그토록 일찍 일어나셨는지, 당신의 것은 늘 미루시면서 삼 형제를 먼저 챙기셨는지, 그 뒤에 숨겨진 수많은 밤들, 홀로 감당하셨을 걱정과 두려움들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가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상상해봅니다. 지금 곁에 부모님, 할머니께서 살아 계셨다면 어떠한 마음으로 나는 살고 있을까? 아무 말 없이 그냥 있어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처의 밀도 사람의 마음은 단순한 평면이 아니다.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안쪽에는 말하지 못한 감정들, 오래된 기억들, 누구에게도 설명되지 않았던 순간들이 얇고 촘촘한 층을 이루며 쌓여 있다. 상처는 그 층을 따라 남는다. 나는 이 결을 바라볼 때마다 상처는 크기가 아니라 밀도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사람들은 흔히 상처를 크기로 판단한다. 큰 사건은 큰 상처, 작은 일은 작은 상처.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금세 흘러가고 어떤 사람은 며칠을 머뭇거리다 밤새 뒤척인다. 같은 상황을 겪어도 한 사람은 지나가고 또 다른 사람은 삶 전체가 흔들린다. 이 차이는 사건의 강도가 아니라, 그 사람 마음 속에서 이미 쌓여 있던 감정의 축적량, 즉 그 사람만의 내적 밀도 때문이다. 어떤 말은 단순한 의견처럼 들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래 감추어온 두려움의 뿌리를 건드린다. 어떤 행동은 사소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된 ‘버려짐의 감각’을 불러온다. 이럴 때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를 탓한다. “왜 나는 이런 일에 약할까.” “왜 이 정도로 흔들릴까.” 하지만 상처가 깊게 남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약해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