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이라는 이름의 압박 추석은 언제부터 ‘부담’이 되었을까. 한가위를 앞두고 사람들은 고향 가는 길을 계산하고, 가족과의 시간을 준비하며 명절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그 속내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설렘보다 피로가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情)을 나누는 명절이라지만, 그 정이 때로는 관계의 의무가 되고, 감정의 짐이 되기도 한다. 명절이 되면 반복되는 인사와 잔소리, 끝나지 않는 식사 준비와 방문 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있음’을 감사해야 한다는 무언의 강요를 느낀다. 가족은 원래 그런 거라며 서로의 말과 행동을 용인하고, 사소한 감정은 덮고 넘어가야 한다는 분위기.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많은 갈등이 싹튼다. 정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서 유독 신성시된다. 따뜻하고 끈끈하며, 무엇보다 ‘관계’를 지속시키는 데 중요한 미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관계가 깊다는 이유로 개인의 경계를 무시하는 순간, 정은 쉽게 압박으로 바뀐다. ‘오랜만인데 좀 참아’, ‘가족끼리 왜 그래’, ‘우리 때는 말이야’라는 말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말처럼 보이지만, 실은 감정을 침묵시키는 도구가 된다. 명절에 모인 가족 사이에서 가장 흔한 갈등은 ‘관계의 거리
어떤 유언을 남기고 싶나요? "요양원에 계신 엄마를 만나러 갑니다." 눈부신 가을볕 아래에 산들거리는 바람이 붑니다. 끝나지 않을 거 같던 여름이 떠나고 어느새 가을이 들어섰습니다. 휠체어를 탄 엄마가 희고 마른 손을 반짝반짝 흔들며 저를 반깁니다. 언제부터이지 엄마는 손을 그냥 흔들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율동 하듯이 손을 펴고 손목을 좌우로 돌리며 반짝반짝합니다. 어린애같은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짠하기도 합니다. 엄마의 매일은 변함이 없습니다. 같은 방을 쓰는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반복되고, 노래교실 선생님 근황도 늘 같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일상적이지 않은 질문을 해 봅니다. “엄마!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우리한테 꼭 하고 싶은 말 없어?” 엄마는 잠시 생각하더니, “잘 살고 있는데 무슨 말을...”하고 얼버무립니다. 다른 말로 바꿔서 다시 물어봅니다. “만일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할 거 같아?” 이번에는 바로 말씀하십니다. “사이좋게 살았으면 좋겠어.” 관계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싶은 걸까요? 엄마의 유언을 미리 알고 싶어서 한 질문이었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다음에는 유언이 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겠
공감 –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세요. 완벽하지 않아도 됩니다. -테일러 스위프트-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매일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변의 많은 변화 속에서 우리는 계속 새로워지는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그것을 놓칠까 봐 쫓아가기만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것, 그것은 정말 내 것이 맞는가?’ 옷을 멋스럽게 잘 입고 다니는 친구에게 “스타일 좋네”라고 말했더니, “나는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사서 입어. 그렇게 입으면 적어도 촌스럽지 않거든.” 어떤 친구는 “나는 하체 비만이라 원피스가 제일 잘 어울려. 원피스만 입어도 단정해 보여서 좋아.”라고 말합니다. 삶은 어쩌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내 것을 찾기 위한 여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상담을 의뢰받고, 내담자를 만났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 소나기가 내려, 그 빗소리에 마음을 기대어 봅니다. 나 자신이 아파도 더 아픈 이를 보면 자신의 상처는 잊고 따뜻한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급한 불이 났을 때만 "도와주세요."라고 외치고 불이 꺼지면 못 본 척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녀
미룬 선택이 남기는 비용 사람들은 선택을 두려워한다. 선택은 책임을 동반하고, 책임은 불확실성과 후회를 동반한다. 그래서 우리는 결정을 가능한 한 미루거나, 다른 이에게 넘기거나, 상황이 알아서 흘러가기를 기다린다. 흔히들 ‘결정 피로’라는 말을 하지만, 사실은 결정 자체가 피로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만들어내는 비용이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회피적 의사결정’이라 부른다. 분명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데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일시적인 안도감을 얻는 방식이다. 당장은 안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공백은 다른 선택들로 채워진다. 미루는 사이 기회는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하거나, 최악의 경우 상황이 통제 불능으로 굳어진다. 결국 선택하지 않은 대가를 자신이 고스란히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관계에서도 이 패턴은 반복된다. 불편한 대화가 예상되면 차라리 침묵을 택하고, 이별을 결심하지 못해 모호한 상태를 이어간다. 갈등을 조율하기보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라는 말에 기대는 태도 역시 선택을 회피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시간이 해결해주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쌓이고, 결국 더 큰
감정에도 데이터가 필요하다 우리는 데이터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소비 내역은 월 단위 그래프로 정리되고, 수면 시간은 스마트워치로 측정된다. 사람들은 칼로리를 계산하며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 기록을 수치화해 자신의 신체 변화를 추적한다. 감각과 경험은 더 이상 흐릿하게 머물지 않는다. 그러나 유독 감정만은 여전히 수치화되지 않는 예외로 남아 있다. 감정은 흐릿하고 비논리적인 영역이라는 전제가 사람들의 사고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이야말로 가장 많은 오해를 낳고, 때로는 인간관계를 가장 크게 무너뜨리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기분 탓’, ‘그냥 싫었어’, ‘왠지 화가 났어’ 같은 말로 감정을 표현한다. 자신조차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감정은 종종 상대를 설득하지 못하고, 결국 ‘예민하다’거나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는 말로 무시되기 일쑤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은 곧 존중받지 못하는 감정이다. 감정은 분명 비이성적일 수 있다. 그러나 추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정기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 반복적으로 무기력해지는 시간대, 혹은 유난히 자주 지치는 상황들은 나름의 패턴과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
글 스승님들이 이어 준 작가의 길 2016년 화창한 봄날이었습니다. 몽글몽글한 구름이 달콤한 솜사탕처럼 푸른 하늘 높이 떠 있는 싱그러운 오후였죠. 나는 그해 시민문화사업 ‘나도 글을 쓸 수 있다’의 기획과 총괄 진행을 맡게 되어 수강생 모집 전단지를 만들었습니다. 주말에는 자원봉사활동을 신청한 학생들과 함께 주변 아파트와 버스 정류장에 전단지를 붙이며 홍보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과 수업 장소 섭외도 해야 했지요. 다행히도 마을 행정복지 센터에서 이 사업을 문화강좌로 도와주셔서 홍보와 장소가 해결되었습니다. 지도 교수님은 고려대학교 사회복지과 시 창작 담당 김순진 교수님께서 오셨고, 수강생들은 초등학생부터 70대 어르신까지 다양한 연령의 시민들 25명이 등록했습니다. 수업은 평일 저녁 두 시간씩 주 2회, 두 달간 진행되었고, 나는 수강생들의 글솜씨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걸 지켜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 한 사람당 시 5편을 제출하라는 과제를 주셨습니다. 계간지 ‘스토리 문학’에서 신인 작가 공모전을 접수하고 있으니 도전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 나에게도 시를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손
공감 – 편안함 맥주를 컵에 잘못 따르면, 거품이 많이 생깁니다. 진짜 맥주는 컵 속에 얼마 남아 있지 않죠. 저는 SNS에 올린 사람들의 사진과 글을 보며 때로는 가식적이고 거품 같다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네이버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무렵, 어떤 친구가 “네이버를 보고 있으면 공포가 느껴진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내 주변에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인터넷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은 편리함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안전함까지는 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사람을 두고 AI와 진짜 사람을 구별해 내라고 합니다. 친절하고 예쁜 미소를 지닌 AI는 사람들의 이상형이 되어 사람의 마음을 속이기도 하는듯합니다. 아버지께서 투병 생활하실 때, 걱정이 늘면서 두통이 생겼습니다. 일하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한의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머리 아플 일이 뭐가 있어요? 죽는 일 말고는 머리 아플 일이 있나요? 결혼하셨어요?” 20대의 어린 내 모습만 보고 하신 말씀에 서글픈 감정마저 들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 상을 치른 후, 너무 기력이 없어 동네 병원을 찾아 선생님께 링거를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이라는 환상 관계에서 가장 흔한 착각 중 하나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는 믿음이다. 오랜 시간 쌓인 정, 함께한 기억, 암묵적인 호의가 있으니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아도 서로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다. 그러나 이 믿음은 단지 관계의 편안함을 가장한 방임일 수 있으며, 대화의 부재를 정당화하는 자기위안일 수도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전제는 결국 자기중심적 사고에 가깝다. “내가 저 사람이라면 이렇게 느꼈을 것이다”라는 추측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감정에 대한 재단이다. 그러나 타인의 감정은 예측이나 추론이 아닌, 직접적인 표현과 확인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말을 건넬 용기를 내지 않고, 표현된 감정을 경청하지 않으며, 서로를 짐작만으로 해석하는 관계는 언젠가 정체되고 오해로 균열이 생긴다. 많은 관계가 ‘오해’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오해를 말하지 않기 때문에 무너진다. 감정이 쌓일수록 조심스러워지고, 조심스러움은 침묵으로 이어진다. 그 침묵은 곧 거리감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멀어질까 봐.” 그러나 진실은 그 반
공감 – 편안한 관계 가을비 내리는 오늘,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다가 잠시 잠들었습니다. 꿈속에서 보고 싶던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살아생전에 모습 그대로, 정정하시고 당찬 모습의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다, 무의식중에 ‘할머니 도와주세요’라고 소리쳤습니다. 비록 꿈속에서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잠에서 깬 후, 아쉬움과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한참 동안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문득 상상해봅니다. 지금 살아계셨다면 할머니는 어떠한 모습이실까? 부모님은 또 어떠하실까? 노인복지관이나 길을 걷다가 부모님을 닮은 어르신을 보면, ‘우리 부모님께서 살아계신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셨던 부모님을 지금 만나게 된다면, 나를 기억하고 알아보실 수 있으실까요? 마음속 깊이 늘 부모님을 향한 그리운 마음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마음 깊은 곳에 돌아가신 부모님, 할머니와의 소중했던 추억에 젖어 그분들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때로는 나 자신을 더 힘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떠나보내야 할 때를 아는 것도 사랑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철학자)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싸운 것도 아니고, 크게 틀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연락이 닿지 않고, 메시지는 읽히지 않는다. 피드엔 여전히 일상이 올라오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응답하지 않는다. 설명도, 마무리도 없는 침묵. 그것은 무언의 퇴장이자, 감정의 유예다. 이런 방식의 관계 종료는 어떻게 보면 깔끔해 보인다. 불필요한 언쟁도 없고, 상처 주는 말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만 제외하면, 사실상 가장 무책임한 이별 방식이기도 하다. 감정은 어딘가로 흘러야 정리되지만, 침묵은 흐름을 끊고 감정을 고이게 만든다. 고인 감정은 해소되지 않고, 결국 피로가 된다. 많은 사람이 말한다. “싸우기 싫어서, 상처 주기 싫어서 조용히 물러났을 뿐이다.” 이 말은 떠나는 쪽에게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데 유용할지 모른다. 하지만 떠남을 통보하지 않은 관계에서 상처는 더 복잡해진다. 오히려 침묵은 가장 가벼운 듯 가장 무거운 방식의 거절이다. 아무런 설명 없이 사라졌기에, 남겨진 사람은 헤어진 이유도, 감정의 끝자락도 짐작할 수 없다. 그렇게 상대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질문만 남는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 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라는 질문은 답 없는 감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