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틀어져야 인생이 시작된다 살다 보면 늘 그렇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드물다. 일찍부터 세운 유학 계획이 막판 변수 하나에 무너지고, 승진은 코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며, 오래 준비한 시험은 예상치 못한 컨디션 난조로 실패한다. 오랜 시간 공들인 관계는 사소한 오해로 멀어지고, 가족처럼 지낸 이와도 이유 없이 어긋난다. 모든 것을 잘 관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인생은 계획이라는 직선을 빗겨가며 자신의 곡선을 그려간다. 그 곡선 앞에서 우리는 묻는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그러나 조금 멀리서 보면 알게 된다. 계획이 어긋나는 건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장이 열리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인생은 편안할 수는 있지만 생생하지는 않다. 설계된 시나리오대로만 흘러가는 삶은 오히려 현실보다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살아 있다는 건 예측을 뛰어넘는 변수와 마주하는 일이다. 그 예측 불가능함 속에서 진짜 내 마음이 드러난다. 계획이 무너질 때 우리는 처음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내 안에 남은 가능성과 감정을 다시 만지작거리게 된다. 준비한 길이 끊어질 때, 우리는 뒤늦게 물어본다. “이게 정말 내가 가고 싶었던
부고 소식은 삶의 과속방지턱 같습니다 한창 바쁜 시간인 오전 9시 17분, 책상 위 놓인 핸드폰에 진동이 옵니다. 알림창에 떴다가 사라지는 메시지를 보니 부고 문자입니다. 조문하기 위해 장례식장을 확인하고, 함께 갈 수 있는 지인을 물색합니다. 직장 인트라넷에는 또 다른 부고를 알리는 팝업창이 떠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계절이 바뀔 때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이 많은데 특히 겨울철이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유명한 배우분들의 슬픈 사연이 전해졌습니다. TV나 영화로만 만나던 분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봐 오던 분들이라 그들에게 내적 친밀감이 있었나 봅니다. 마치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처럼 마음이 울적하고 쓸쓸했습니다. 좀 더 기다리다 꽃피는 계절에 떠나도 좋을 텐데, 뭐가 그리 급해서 추운 계절에 떠났는지 안타까운 마음에 하늘을 바라봅니다. 세상에 알려진 이들의 부고 소식이 전해질 때면, 뉴스에서는 그들의 치열했던 삶과 이룬 업적들을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줍니다. 텔레비전에 비치지 않는 보통 사람의 경우 비록 그런 추모 영상은 없지만, 유명인 못지않게 삶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을 겁니다. 저의 부모님이 그랬고, 제 이웃이 그랬던 것처럼
새해의 태도는 조용하게 결정된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이란 늘 묘하다. 달력 한 장만 넘겼을 뿐인데도, 왠지 인생의 방향 전체가 바뀔 수 있을 것만 같고, 과거의 실수도 새하얀 리셋 버튼을 누른 듯 무효화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스며든다. 그러나 삶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초기화되는 것이 아니다. 결심은 때때로 좋지만, 태도는 단순한 다짐으로 바뀌지 않고, 현실과의 마찰 속에서만 조금씩 조정된다. 그래서 새해는 거창한 목표보다 조용한 태도를 다시 정비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변화는 선언이 아니라 지속이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다시’라는 말에서 위안을 얻고, 누군가는 ‘이번엔 잘해보자’는 주문을 반복한다. 하지만 사람은 해가 바뀌었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의욕은 새로워도 습관은 끈질기고, 기대는 커졌지만 일상의 관성은 어제 그대로다. 그래서 더 필요한 건 ‘의지’보다 ‘이해’다. 내가 왜 늘 같은 지점에서 주저앉는지, 무엇을 놓치면 불안해하는지, 어떤 종류의 강박에 길들어 살아왔는지를 바라보는 일. 새로운 한 해는 자꾸 무언가를 더하려 애쓰기보다는, ‘덜어내도 괜찮다’는 자기 수용의 태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올해는 진짜 잘 살아야 해.” 많은 이들이 새해 앞에서 하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책 한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데일리 필로소피 Q&A>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은 365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매일 1가지씩 묻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독자의 생각을 적을 수 있는 약간의 공란을 두고 있었습니다. 책은 ‘JAN 1일, 2일, 3일…’ 일자별로 구성되어 있어, 마치 1월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올해의 마지막 주이자 새해가 시작하는 주의 첫날부터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을 기록해가고 있습니다. 며칠 후 해가 바뀐 1월 1일에는 다섯 번째 물음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가?’라고 묻고 있더군요. ‘공교롭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한 해를 시작하는 날에 꼭 필요한 질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부터 시작하는 새해에 어떻게 살고 싶니?”라고 저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머릿속에 온갖 긍정적인 단어와 표현들이 떠다녔습니다. 하지만 결국 ‘잘 살고 싶어요!’라는 짧은 답을 썼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이 다시 질문합니다. ‘잘 사는 게 뭘까요?’라고…. 아마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성탄절이 지난 거리엔 여전히 캐롤이 흐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설렘이었던 그 음악이 이젠 조금 쓸쓸하게 들린다. 겨울은 항상 그런 계절이다. 찬 공기와 반짝이는 불빛이 겹쳐질 때, 오히려 마음은 더 고요해지고, 더 멀어진다. 올해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애썼다. 회사의 구조조정 앞에서 매일 출근이 두려웠던 사람, 막연한 불안을 견디며 진로를 고민한 청년들, 그리고 아이의 수험표를 붙잡고 지금도 결과를 기다리는 부모들. 누구는 삶이 휘청이는 시간을 버텼고, 누구는 애써 괜찮은 척하며 하루를 넘겼다. 반짝이는 뉴스보다, 그저 조용히 하루를 견디고 있었던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특별한 이정표도, 눈에 띄는 성과도 없었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대단한 한 해였다. 누군가에게 2025년은 ‘무언가를 이룬 해’일 수 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2025년은 ‘무너지지 않고 버틴 해’일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까지 도착한 우리는, 그 자체로 충분히 잘한 거다. 새해는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에겐 아직 이 해의 마지막 며칠이 남아 있다. 다시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보다, 조용히 한 해를 쓰다듬는 일부터 시작
당신의 기쁨은 무엇인가요?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섭니다. 아직 어둠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늘 한편에는, 자라지 않은 손톱을 자른 것처럼 얇은 초승달이 가만히 떠 있습니다. 달이 차오르는 모습을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저렇게 지고 있는 걸까요? 그러고 보니 올해도 다 가고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다사다난했던 해라고 말하는데 저에게도 올해는 유독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이 해에 있었던 많은 일이 희미한 사진처럼 때로는 선명한 영상처럼 흐르듯 지나갑니다. 아프고 슬펐던 기억도 있었지만, 감사하고 행복했던 추억이 더 많은 듯합니다.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자극에 물들어 있는 요즘 사람들, 저로서는 그 감정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휘발되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기쁨에 대해 알게 되고 경험했던 한 해이기도 했던 거 같아요. 특히 그 가운데 하나는, 부족함을 느끼고 가끔 힘에 부치지만 글쓰기의 기쁨을 배우고 있는 겁니다. 물론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고 기억되네요. 그래도 글을 쓰며 좋았던 것은, 제 마음의 감정정리가 유연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위안을 주기도 했고요. 간혹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갈피를 잡을 수 없고 어느 때는 안개 낀
공감 –친절- 병원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습니다. 임신 중 산부인과 진료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간호사가 환자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대답하지 못하는 아기 엄마를 보았습니다. 그녀는 백일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기를 달래고 있었고 진료실로 들어갈 때, 잠시 아기를 맡길 곳을 찾는 듯 보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먼저 진료받았고, 간호사는 또다시 몇 차례 그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옆에 계시던 한 아주머니가 조용히 다가와 말씀하셨습니다. "아기 봐주실 분이 없으신가 봐요? 진료받으시는 동안 제가 안고 있을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진료 보고 나오세요." 그제야 그녀는 아기를 조심스럽게 낯선 아주머니께 맡기고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13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합니다.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걸까요? 간호사에게 잠깐이라도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었을까요? 그리고 아무리 선한 마음을 받았다 하더라도 백일도 안된 아기를 낯선 이에게 맡기는 것이 정말 괜찮은 일이었을까요? 세월이 흐르면서 느껴집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연이
상처를 다시 부르지 않는 법 우리는 누구나 말하지 못한 상처 하나쯤은 품고 산다. 돌아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는 일인데, 이상하게 오래 남아 마음 한 켠을 붙잡는 기억들. 누군가의 가벼운 말 한마디, 이해받지 못했던 순간, 그 나이의 우리로서는 버겁기만 했던 관계의 무게 같은 것들. 그 상처를 준 사람들은 이미 그 사건을 잊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때 느꼈던 수치심과 위축, 혹은 너무 어려서 표현하지 못했던 억울함이 아직도 마음속에 작은 그림자처럼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오래된 그림자는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말라붙어 어떤 순간에는 내 선택을 막고, 관계를 흔들고,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감각까지 흐리게 만든다. 그렇다고 해서 그 상처를 다시 파헤쳐 누군가에게 이해를 구하고, 사과를 받아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짜 바라는 것은 ‘그들이 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내가 이해해 주는 것’일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작고, 훨씬 어렸다. 말을 잘하는 법도 몰랐고, 거절하는 법도 몰랐고, 상황을 해석할 힘도 없었다. 그저 버티
까치와 나무, 그리고 행복의 조건 늦은 출근을 했습니다. 이미 도로는 차로 가득하고 느리게 움직입니다. 신호대기를 위해 멈춰 선 후 무심하게 주변을 둘러봅니다. 차도 건너편 마른 잔디밭 위에, 앙상한 가지를 부챗살처럼 펼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옵니다. 텅 빈 나뭇가지들 사이로 새 두 마리도 보이고요. 서로 다른 가지 위에 앉아있어서, ‘쟤네 둘은 서로 친하지 않나 봐.’라며 조용히 혼잣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걸까요? 제 생각이 틀렸다며 보란 듯이 함께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또 다른 한 쌍이 날아와 나뭇가지를 차지합니다. 하얀 가슴을 내밀고 긴 꼬리를 뽐내는 것을 보니 까치인 거 같습니다. 아마 그 나무에서 새들은 잠시 쉬어가려나 봅니다. 사실 저는 얼마 전 SNS에 올려진 ‘행복의 조건 6가지’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3가지나 5가지처럼 딱 떨어지지 않고 6가지라서 더 시선이 갔습니다. 글 쓴 분이 생각하는 첫 번째는 ‘친구가 있다’였고, 여섯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였습니다. 우정으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마무리한 그 글을 예전에는 흘려 읽었습니다. 그런데 까치와 나무의 모습이, 행복에 필요한 조건에 대한 그 글의 처
공감 -콤플렉스- 당신의 콤플렉스는 무엇입니까? 사춘기가 되면서 콤플렉스가 늘어난 것 같습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단체생활을 하면서 성적부터 키로 자리 순서를 정하는 일까지,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단체생활보다는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늘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콤플렉스도 사라져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열등감은 외부에 집중할 때 생겨나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은 가족과 함께 ‘주토피아’ 영화를 보았습니다. 주디 홉스(토끼)와 닉 와일드(여우)가 주인공입니다. 주디 홉스(토끼)는 주토피아 최초의 토끼 경찰관이며, 닉 와일드(여우)는 사기꾼에서 주디 홉스(토끼)의 파트너 경찰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도시의 겉으로 보이지 않는 문제를 파헤치며, 관계의 발전과 사회적 성장을 그려냅니다. 그들은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서로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둘은 공격하거나 상대를 자신에게 맞추려 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성향을 받아들이려 노력하며, 배려와 우정으로 다름을 인정합니다. 닉 와일드(여우)가 조용히 말합니다. “여긴 아무도 자기 자신을 설명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