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의 밀도
사람의 마음은 단순한 평면이 아니다.
겉으로는 조용해 보이지만, 안쪽에는 말하지 못한 감정들, 오래된 기억들,
누구에게도 설명되지 않았던 순간들이 얇고 촘촘한 층을 이루며 쌓여 있다.
상처는 그 층을 따라 남는다.
나는 이 결을 바라볼 때마다 상처는 크기가 아니라 밀도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사람들은 흔히 상처를 크기로 판단한다.
큰 사건은 큰 상처, 작은 일은 작은 상처.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금세 흘러가고 어떤 사람은 며칠을 머뭇거리다 밤새 뒤척인다.
같은 상황을 겪어도 한 사람은 지나가고 또 다른 사람은 삶 전체가 흔들린다.
이 차이는 사건의 강도가 아니라, 그 사람 마음 속에서 이미 쌓여 있던 감정의 축적량,
즉 그 사람만의 내적 밀도 때문이다.
어떤 말은 단순한 의견처럼 들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오래 감추어온 두려움의 뿌리를 건드린다.
어떤 행동은 사소한 실수처럼 보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된 ‘버려짐의 감각’을 불러온다. 이럴 때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를 탓한다.
“왜 나는 이런 일에 약할까.”
“왜 이 정도로 흔들릴까.”
하지만 상처가 깊게 남는 이유는 그 사람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이 그만큼 정직했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한 순간들을 혼자 견디며 지나왔고,
누군가에게 기대지 못해 스스로 지탱해온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한마디 말에도 마음의 결이 크게 흔들리는 것이다.
그러니 남이 쉽게 재단하는 상처는 늘 위험하다.
“그거 별일 아니다.” 이 말은 위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상대의 마음 구조를 알지 못한 채 상처의 밀도를 평면으로 만드는 행동이다.
상처는 사건이 아니라 ‘닿은 지점’에 의해 남는다.
그 지점이 얼마나 오래 방치되어 있었는지, 그곳에 어떤 감정들이 눌려 있었는지,
그 감정들이 지금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 이 모든 것이 상처의 밀도를 만든다.
상처가 쉽게 흐려지지 않는 이유는 사건이 큰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오래된 감정과 맞닿았기 때문이다.
즉, 상처의 밀도는 그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오래 버텨왔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치유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상처는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아물었다고 생각해도 특정 순간에 다시 반응하고,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도 문득 마음이 기울어지는 날이 있다.
이건 실패가 아니라 마음의 자연스러운 작동 방식이다.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가벼워지는 방식으로 변할 뿐이다.
결이 부드러워지고, 파동이 완만해지고, 붙잡고 있던 에너지가 천천히 풀리면서
내면의 무게 중심이 옮겨간다.
그 변화는 거창한 사건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작은 순간들에서 시작된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단 몇 분의 정적, 누군가의 따뜻한 한마디,
기대 대신 경계를 선택하는 용기,
그리고 더는 나를 소모시키지 않겠다는 아주 작은 ‘내 편 서기’.
이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이 마음의 빛이 들어갈 틈을 만든다.
그 틈이 생기면, 상처의 밀도는 서서히 옅어진다.
나는 상처를 오래 끌어안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서둘러 괜찮아지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상처의 밀도는 시간이 만든 결이다.
그 결을 함부로 밀어내거나 덮어버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
당신이 쉽게 무너지는 건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다.
당신 마음에 오래 쌓여 있던 감정의 층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다.
그 층은 삶을 버텨온 기록이며,
당신이 그동안 얼마나 혼자 견뎌왔는지를 말해주는 증거다.
상처의 밀도는 결국 사람을 깊게 만든다.
언젠가 그 깊이는 아픔의 흔적이 아니라, 당신이 살아낸 시간의 결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은
당신을 더 단단하게, 더 선명하게,
더 자신답게 만들 것이다.

최보영 작가
경희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석사
UM Gallery 큐레이터 / LG전자 하이프라자 출점팀
[주요활동]
신문, 월간지 칼럼 기고 (매일경제, 월간생활체육)
미술관 및 아트페어 전시 큐레이팅
[수상경력]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대한민국경제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