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성장 우리들의 겉모습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합니다. 지금의 나의 모습은 어느새, 40대 중 후반 아줌마의 모습이 되어 있습니다. 변화된 나의 모습을 거울을 보며 가만히 마주합니다. 나는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는가. 내 마음 안에 있는 내면 아이는 성숙한가. 어른과 아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일까를 생각할 때, 어른들이 아이들 보다 감정조절이 가능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만의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을 내버려 둔다면 퇴행하여 더 깊은 결핍으로 힘듦을 느끼곤 합니다. 딸아이가 성장하는 모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울기만 했던 아이가, 수줍지만 엄마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모습, 엄마가 마음 상하지 않게 예쁜 말과 미소로 품에 안겼던 모습, 기분 좋을 때와 속상할 때의 마음을 잘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려 하는 모습이 참 대견해 보였습니다. 그런 성장들은 마음을 헤아려주는 ‘엄마’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어렵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내면 아이가 느껴지는 대로 힘들면 징징대고, 불안하면 들뜨고, 즐거우면 혼자 신나서 덩실거리는 내 모습을 알아차리게 될 때면 실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친
폭싹 속았수다, 숨비소리 제주에 유채꽃이 4월 말에도 예쁘게 피었다. 파종을 늦게 한 때문이라니 살면서 이런 행운이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노랑과 연두색의 유채꽃 들판을 가로지르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 본다. 말을 타고 유유히 걷는다. 제주에서 자연과 함께 휴식이 있는 선물같은 시간이 된다. 제주 바다는 동해바다에서 느끼는 심오한 깊음과 함께 따뜻한 여성의 숨결로 다가왔다. 바로 해녀박물관을 통해 알게 된 깊은 숨소리, 제주 해녀의 ‘숨비’를 알고 나서이다. ‘숨비’는 해녀들이 ‘물질 후 내뱉는 생존의 숨소리’라고 한다. 그것은 호흡 이상의 숨쉼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인간의 본능적 외침과 세대를 잇는 생존의 소리 같은 것이다. 이처럼 제주 해녀의 숨비 소리는 단순한 호흡만이 아니다. 그들이 깊은 바닷속을 오랜 시간 숨을 참고 물질을 마친 뒤 수면에 올라 내뿜는 거친 숨 가쁨은 현대를 사는 우리네 삶을 향한 의지와 수고에 비교 가능할까? 숨비는 자연과 호흡하며 주고받는 ‘나 여기 살았소!’라 내뱉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호흡이고, 위대한 언어이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맨몸으로 잠수하고, 자연의 산물들을 자율 채취하며 조화를 이뤄낸 해녀들이
꽃다발 선물을 오래 간직하려면 연극이 끝나면 마음은 꽃밭이다. 관객들이 전해준 꽃다발로 침대 머리맡을 꾸며놓고, 꽃들이 시들기 전까지 딱 일주일 동안, 내 방도 꽃밭이다. 공연 후의 행복감과 꽃향기에 취해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듯 달콤하고도 몽롱한 시간은 작지만 소중한 행복이다. 나는 행복한 연극배우다. 어쩌다 보니 마을에서 모집하는 시민연극동아리 <주부연극교실>에 참가하면서부터 활동한 것이 올해 18년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래 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한 번만이라도 무대에서 연극을 해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무대에 서게 될 줄은 꿈도 못 꾸었다. 어쩌면 꿈을 이룬 셈이다. 대부분은 소극장에서 올리는 단편 공연들이지만, 작품을 준비하면서 조금씩 성장해가는 내 모습에 나름 뿌듯함을 느낀다. 게다가 때마다 꼭꼭 찾아와주는 지인들과 팬들의 박수 소리와 꽃다발의 향기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한 나만의 행복이다. 처음 몇 년은 함께 공연하는 팀원들도 다 같이 경험도 없이 시작한 아마추어들이었기에 연기도 서툴렀고, 공연하는 내내 우왕좌왕 실수투성이였고,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다 보
- 공감 - 용기 며칠 후면 내 첫 책 '마음아, 아직 힘드니'가 세상에 나옵니다. 책장에 꽂힐 내 이름이 선명한 책을 상상하니 기쁩니다. 반복을 되풀이하며 글을 다듬던 순간들, 마음을 쏟아내던 그 시간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누군가의 손에 들려질 생각에 설레고 두근거립니다.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겨봅니다. 내 책이 출간되면 누가 제일 기뻐할까?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을까? 문득 아버지의 미소가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어릴 적 시험 점수가 좋았던 날, 작은 상을 받았던 날,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으셨지요.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 딸 상 탔어." 하며 자랑을 시작하시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립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런 순간이 아버지의 유일한 낙이라는 것을. 때로는 그 자랑이 싫어서 일부러 안 좋은 소식만 전했던 적도 있었지요.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 마음이 얼마나 행복하셨을지, 그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느껴집니다. 아버지가 지금 곁에 계셨다면, 내 책을 들고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요? 아마도 책을 가슴에 품고 주무셨을 것 같아요. 지인들에게 "우리 딸, 책 출간했어"라고 수줍게, 그러나 자랑스럽게 말씀하
환대의 열매들 ‘차가운 겨울날 그리고 이제 따뜻한 봄날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려 합니다. 서로에게 향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져 더 많은 사람에게 닿기를 소망합니다. 저희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해 주세요.’ 라일락 빛 엽서가 담긴 투명봉투, 결혼 준비를 완벽하게 마무리한 아들의 청첩장을 건네는 친구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세월의 주름살마저 활짝 펴진다. 진심으로 축하하며 돌아서는데, 10여 년 지나버린 내 아들의 결혼 이야기가 내 마음에서 솔솔 피어난다. 스물다섯 살, 대학원 1학년을 마친 아들은 뜬금없이 결혼 얘기를 꺼냈다. 지금 아니면 결혼할 시간이 없다며 부모가 있는 한국으로 잠시 들러 신부감을 소개했다. 젊은 날 준비한 국가 고시를 1년 앞둔 이 친구, 앞뒤 돌아볼 겨를도 없는데 어찌하란 말인가? 말리면 공부가 안될 것이고, 허락하면 학비와 생활비가 고민이다. 자식의 결혼 적령기에 대해 평소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둘의 사랑은 젊은 열정만큼이나 뜨겁고, 결혼하기에 손색이 없다며 승낙을 청한다. 두 사람은 바로 결혼식을 진행하고, 꽃다운 나이의 신랑 신부는 두 손을 꼬옥 잡고 보금자리를 찾아 머나먼 곳으로 떠났다. 이왕지사 축복을 비는 내 마음도 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내는 중입니다 우리 아파트 환경팀 김부장님은 늘 조용하다. 누구보다 먼저 출근하고, 누가 알아채기도 전에 퇴근하신다. 일을 하고 계신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처리가 끝나 있다. 식사 시간 즈음이면 단지 내 구석진 벤치에서 김밥 한 줄로 끼니를 때우고, 날씨가 갑작스럽게 바뀌는 날에도 언제나 그 자리에 먼저 나가 계신다. “감사합니다”라는 단지 관리 앱의 짧은 알림 이외에, 그분의 수고를 길게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아파트가 별일 없이 조용히 굴러가는 이유 중 하나는 김부장님이 매일 제자리를 지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탁실에 물이 새기 전 이미 수리가 끝나 있고, 비가 온 다음 날이면 낙엽이 사라져 있다. 사람들이 체감조차 못 할 만큼 매끄러운 흐름 속에 누군가의 수고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단지 내 작은 불편이 곧장 해결되는 일상, 그 자연스러움은 사실 누군가의 무수한 반복 위에서 가능해진다. 그는 늘 그랬다. 설명하지 않고, 티내지 않고, 그저 자리를 비우지 않는 사람. 나는 그분을 보며 종종 생각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어떤 이는 아이가 잠들고 난 밤에야 비로소 자신의
딸에게 쓰는 필사책 오늘 내가 만든 습관이 내일의 나이다. 당신에게 내일을 만들어가는 즐거운 습관은 무엇인가? 스마트 폰 일상화로 음성통화 대신 문자를 하고, 키보드로 생각을 정리하는 효율적인 시대에 손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점점 요원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베껴쓴다’는 손끝 감각을 즐기면서 필사를 한다. 좋은 글귀나 시 또는 책 속 문장 그리고 고전과 성경을 쓴다. 필사는 나에게 글쓰는 일에 있어서 머나먼 목적지까지 이르게 하는 좋은 습관이다. 그 긴 여정을 성공적으로 달려갈 수 있는 즐거운 도구이다. 평소 편지나 메모를 즐기는 나에게 필사는 딱이다. 손으로 쓰는 동안 한 글자, 한 문장을 필사하면서 집중하게 된다. 흩어진 마음을 좋은 글귀에 비추다 보면 회복과 몰입감을 경험한다. 바쁜 세상 속, 숨 가쁘게 달려온 마음의 속도도 잠시 늦추며 호흡을 가다듬게 한다. 마음이 혼미할 때 좋은 글귀들은 자신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한다. 손끝 따라 써 내려간 문장들이 깊은 대화로 이끈다. 흩어진 생각들이 모여지고 언어 감각이 깊어진다. 좋은 글귀나 문장들이 나의 이야기가 되고 내가 살아있다는 존재에 머무른다. 때로는 도끼로 쪼개는 아픔도 감내하다보면 어느
-공감-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 새해가 오면 거리는 활기를 띱니다. 사람들의 눈빛은 희망으로 반짝이고, 발걸음은 새로운 꿈을 향해 분주히 움직입니다. 가슴속에는 변화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르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 달, 두 달, 달력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 무력감이 스며드는 듯합니다.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듯하지만, 같은 공간, 새로운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른 환경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요. 어른들이 밤중에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요. ‘그냥 눈을 감으면 잠이 오는데, 왜 그렇게 어려워하실까?' 어리숙한 의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이렇게 고민이 많아 보이실까? 왜 잘 드시지도 못하는 맥주를 드시고, 취하시고 괴로워 보이는 걸까? 그냥 마음 편하게 살면 안 되는 걸까?’ 어린 내 눈에,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나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서야, 그 답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놓인 환경을 이해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들,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내일을 향해 가는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착각에 대하여 사람은 참 쉽게 안다고 말한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몇 번의 행동을 지켜본 뒤 우리는 상대를 ‘이해했다’고 단정지어버린다. 더구나 그가 내 곁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이라면, 그 판단은 더욱 확고해진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상대의 마음을 더 이상 묻지 않게 된다. ‘쟤는 원래 그래.’ ‘그런 말 할 줄 알았어.’ ‘지금쯤이면 이런 기분일 거야.’ 그렇게 익숙함은 점점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은 결국 단정으로 굳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관계는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한다. 단정은 대화의 문을 닫는다. 관계를 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납작하게 만든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해가 쌓이고, 설명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침내 침묵으로 굳는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믿었던 그 마음은 사실 다 알지 못했던 마음이었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외로웠으며, 외로움은 결국 분노나 무관심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렇게 가까웠던 사이일수록 더 깊은 오해와 거리감을 경험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던
Barking up the wrong tree - 엉뚱한 사람을 탓한다. 잘못 짚는다. 살다 보면 종종 감정이 앞서서 상대방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지나치는 동료를 두고 “날 무시하나?”라고 생각하거나, 아이에게 짜증을 냈다가 알고 보니 내가 피곤했을 뿐이었던 날도 있었죠. “내가 괜히 엉뚱한데 화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런 말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Barking up the wrong tree>는 이런 상황을 딱 맞게 표현해요. “잘못된 나무에 짖고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 표현은 잘못된 대상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문제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상황에서 자주 쓰인답니다. - <the wrong tree> 잘못된 나무 <barking up> ~에 짖고 있다 이 표현은 19세기 초 미국의 사냥 문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개를 데리고 다람쥐나 너구리 같은 동물을 숲에서 사냥했어요. 사냥개는 냄새와 소리를 따라 동물을 쫓았고, 위협을 느낀 동물이 잽싸게 나무 위로 도망치면, 사냥개는 나무 아래에서 짖으며 사냥꾼에게 그 위치를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가끔 사냥개가 동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