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의 좌충우돌 인생 3막

조용한 용기


 

새해 첫날 이른 아침, 평소 연락이 없었던 전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떡국이라도 같이 끓여 먹자고 한다. 전화를 끊자마자 부랴부랴 집 앞 슈퍼로 향한다. 급한 대로 떡국에 필요한 국거리용 소고기, 곰탕 국물 등을 사 들고 왔다. 예전엔 소파에서 팔짱 끼고 TV 보며 기다릴 줄만 알던 사람이 웬일인지 돕겠다고 팔을 걷어붙이며 나섰다.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할머니 말이 생각나 ‘픽’ 싱거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파를 다듬고 계란지단을 부쳐달라고 했다. 예상치 못했던 도움의 손길 덕분에 한껏 솜씨를 부려 상을 차릴 수 있었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위한 상차림이라 새색시 때처럼 설레기도 했다.

 

그런데 급하게 준비하려니 미리 떡을 불려놓지 않은 게 제일 난감했다. 하지만 다행히 25년, 주부 경력으로 터득한 ‘꿀 팁’이 생각났다. 따끈따끈한 냄비 물에 떡을 담가 놓고 식지 않도록 약한 불 위에 10분에서 15분 정도 올려놓으면 아무리 딱딱한 떡이라도 금방 먹기 좋게 말랑말랑해진다. 다음엔 냉동 고기를 해동하고 잘게 다져서 간장, 후추, 다진 마늘과 참기름으로 조물조물 밑 간을 해놓고, 또 다른 냄비에 곰탕 국물을 끓여서 불린 떡과 밑간해놓은 고기를 넣고 바글바글 끓여준다. 한쪽에선 전남편이 깨끗하게 손질한 대파를 잘게 썰고 노랗게 지진 달걀지단을 채 썰고 있다. 식탁 언저리에는 큰아들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고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낸다. 작은아들은 가위를 들고 구운 김을 잘게 썰며 형과 함께 연신 장난을 치고 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단란한 식탁 풍경인가? 순간 가슴속 깊은 곳, 알 수 없는 감정의 밧줄이 심장을 꽁꽁 옥죄고,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듯 울컥했다. ‘울면 안 된다. 얼마 만에 온 소중한 순간인데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절대 안 된다’라며, 아이들의 농담 때문에 웃는 것처럼 나는 크게 웃었다. 웃음 끝에 깊은 한숨을 내 쉬며 뜨거운 덩어리를 애써 삼켰다. 다행히도 한순간 나를 엄습했던 미묘한 감정의 폭풍은 아무도 모르게 지나갔다.

 

드디어 우리 네 식구가 모인 식탁 위에 새해의 떡국 상이 차려졌다. “지난해 모두 수고 많았어, 그리고 새해에는 더욱 건강하고 좋은 일들, 많이 생기길 바랄게. 우리 가족 모두 사랑해” 내가 먼저 입을 뗐다. 그러자 전남편도 웃으며 덕담을 내놓았고 아이들도 환한 웃음과 함께 감사의 말들을 풀어 놓았다. 떡국은 어느 때보다도 진짜 맛있었다. 이렇게 소중하고 맛있는 시간이 또 있을까? 너무 행복하고 감격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매년 새해 첫날엔 가족회의를 했었다. 그 시간은 네 명이 돌아가면서 지난해에 잘한 일과 아쉬웠던 점을 이야기하고, 또 새해에 꼭 하고 싶은 일이나 목표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시작한 연중행사였으니 제 작년까지 10년간 꾸준히 해 왔었다. 하지만 작은아들의 독립과 더불어 남편과 이혼하면서 몇 해 동안 못해서 참 아쉬웠다. 이참에 매년 이맘때 했던 새해 계획을 몇 년째 못해서 아쉽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아이들도 아빠의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이자 전남편 역시 나쁘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오늘은 준비가 안 됐으니 다음에 같이 예전처럼 지난해 반성도 하고 새해 계획을 이야기 나누어 보자고 했다. 드디어 올해에 그동안 못했던 우리 가족의 새해 계획 나누기를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나 감사한 새해 첫 끼였다.

 

나의 조용한 용기 덕분에 떡국 속에 담겨있던 행복이 집안 가득 조용히 채워지고 있었다.

 

떡국 한 그릇 뚝딱 먹었으니 나이도 한 살 더 먹었다. 올해의 새해 첫 끼를 행복하고 맛있게 먹었으니 아주 든든하다. 이 든든함으로 25년도 계획을 알차게 짜고 뚝심 있게 이루어 가야겠다. 그동안은 한 가정의 엄마로서, 아내로서 목표를 세웠었지만, 이제부터는 오로지 나로서 혼자만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 아직은 관성 때문인지 자꾸만 아이들과 함께할 거리만 생각나지만, 곧 적응될 것이다.

 

2025년은 어느 해보다 잘 살 것 같다.

 

혼자 밥 먹고 사는 여러분들 모두 힘내자고요. 아자. 아자. 파이팅!!

 

 

“용기는 자신을 위한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 마이클 조던

 

 

▲ 윤미라(라떼)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스토리문학 계간지 시 부문 등단
안산여성문학회 회원
시니어 극단 울림 대표
안산연극협회 이사
극단 유혹 회원
단원FM-그녀들의 주책쌀롱 VJ

 

[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