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의 좌충우돌 인생 3막

소통과 불통


소통과 불통은 ‘한 끗 차이’라던데 과연 그럴까? 모든 경우에 ‘그렇다’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아마도 ‘작은 깨달음만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었다’라는 경험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일 것이다. 소통을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자의 뜻으로는 ‘소통할 소(疏), 막혀 있던 것을 치우고, 통하게 하다’와 ‘통할 통(通) ‘통하다’, ‘내왕하다’, ‘알리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다. 소통을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로의 생각이 통하는 구멍을 뚫어야 할 힘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대화할 때마다 상대에게 집중하고, 잘 보고, 잘 들으려고 애쓰는 편이었다. 그러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대화가 잘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상대가 나에게 어떤 목적이나, 선입견이 있는 경우, 둘 사이에 불통이라는 두꺼운 벽이 세워지고, 언젠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뚫을 수 없는 그 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땐 결국 포기하고 만다. 물론 소통을 위한 노력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훨씬 많다. 그 때문에 요즘 같은 과잉 인간관계 시대에 ‘소통 전문가’라던가 ‘소통의 기술’이란 키워드들이 ‘유튜브’에서 검색어로 인기 있는가 보다. 생각해 보면 일상에서 꽤 많은 것들이 소통이 잘 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우리의 하루를 들여다보자. 잠에서 깨는 순간, 핸드폰의 알람 소리를 들으면서부터 자신과 대화를 시작한다. “일어나. 당장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이라고” 이성적인 자아와 본능적인 자아가 서로 소통을 잘한다면 아침부터 막힘없이 하루가 잘 풀릴 것이다. 하지만 어떤 날은 완전히 불통인 날도 있다. 전날 무리한 일정으로 몸이 무겁다거나,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소식으로 계획한 일정을 무시하고 급한 일부터 해야 할 때 말이다. 겨우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설 때면 또, 어디선가 잔소리 같은 질문들이 쏟아진다. “차 열쇠는 챙겼어? 핸드폰은? 지갑은? 노트북은?” 여유 있게 준비한 날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나하나 확인하고 기분 좋게 집을 나서겠지만, 조금이라도 늦게 일어나 급한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 날엔 “몰라, 어떻게 되겠지”라며 뒷일을 생각지 않고 일단 뛰쳐나간다. 그러다 다시 돌아와서 빠뜨린 물건들을 챙기면서 거친 말을 내뱉고 기분까지 망치는 날이 종종 있지 않은가?

 

나 역시 2년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 중에서 2~3일은 이렇게 망친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요즘은 기분 좋게 아침을 맞이하는 날이 많아졌다.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일상에서 나와 소통을 잘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는 계기가 있다. 예전에 나는 시간개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직장 생활하던 30대 초반까지 거의 매일 늦는 지각생이었다. 게다가 약속 시간에도 항상 늦었고, 과제나, 일감을 제출할 때도 마감 1분 전에 간신히 턱걸이하는 세상에서 제일 느린 거북이였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시간개념을 알았으니, 무려 30년 동안 마음 깊숙이 세워진 불통의 벽은 엄청나게 두꺼워져 있었다.

 

‘거북이’ 입장에서 지각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무대 위의 배우 입장은 달랐다. 맡은 역할에 따라 그에게 어울리는 일상적인 리듬을 표현해야 했고, 거북이의 느린 일상적 리듬은 배우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좋은 배우가 되려면 시간을 스스로 통제하는 법부터 익혀야 했다. 그다음엔 상대가 누구든지 소통하지 않으면 도저히 무대에 설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를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연극공연은 불특정 다수의 관객과 정한 약속이다. 느림보의 핑계 따위는 못난 배우라는 꼬리표만 붙여줄 뿐이었다. 숨어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내면 아이’와 대화하고 소통하기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연극 활동은 나를 들여다보고, 성찰하고, 뜯어고칠 수 있도록 작품 속 역할을 통해 가지각색의 못나고 나약한 인간상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두꺼운 불통의 벽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씩 성숙해졌다.

 

불통의 벽 앞에서 늘어놓는 불평불만은 소극적인 소통방식이었다. 막힌 벽을 뚫어야 통할 수 있다는 걸 몰랐기에 서툰 감정표현들로 답답해하기만 했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 되고, 힘을 써야 뚫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젠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상에게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함을 느낀다. 소통과 불통은 ‘손바닥 뒤집기’처럼 한 끗 차이지만, 뒤집으려는 ‘생각’이나 ‘결심’이 있어야 바뀔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힘과 노력이 꼭 필요한 것이다.

 


 

[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