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의 좌충우돌 인생 3막

외할머니의 도마


덜컥 가게부터 얻어놓고 몇 달째 비워 두고 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17년째 해오던 지역 예술 활동을 그만두려는데, 마무리만 벌써 6개월째다. 공방은 도마를 다듬고 이름이나 로고, 기념 문구 등을 프린팅해서 판매할 수 있다. 지인들은 언제 오픈하냐고 난리인데 정작 주인인 난 천하태평이다. 한두 달은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다. 그동안 바지런 떨며, 나름대로 자부심도 컸다. 그런데 막상 내려놓자니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설상가상으로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진짜로 몇 주간은 꼼짝 못 하게 생겼다.

새해는 밝았고 명절은 다가온다. 핸드폰은 내 속도 모르고 새해 인사와 덕담 메시지를 열심히 배달한다. 예전 같으면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담으려 정성껏 답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기필코 쉬어 가리라 마음먹었으니 대충 넘겼다.

 

그러다 문득 오랜만에 동창에게 온 메시지를 보았다. 중학교 시절 늘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였다. 몇 달 전, 통화하면서 내가 공방을 운영할 계획으로 가게를 얻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친구는 그걸 기억하고 명절 선물용으로 도마 다섯 세트를 주문했다. 고맙고 기분 좋았다. 반가운 마음에 당장 친구에게 전화해 신나게 수다를 떨고, 도마 제작에 필요한 얘기도 했다. 오일도 바르고, 프린팅하고, 예쁘게 포장해 사진을 찍으니 제법 고급스럽고 멋이 난다. 선물을 보며 미소 짓는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니 덩달아 신이 난다. 친구에게 완성된 제품의 사진을 전송하고 직접 배달을 다녀왔다. 집에 오는 길, 갑자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허리 아픈 줄도 모르고 종일 꼬박 엎드려 일한 자세가 문제였나 보다. 그래도 배달까지 마치고 돌아오면서, “노동의 신성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괜히 혼자 뿌듯하고 흐뭇했다.

 

도마를 다듬으니 외할머니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땐 외갓집과 가깝게 살았다. 그러다 서울로 이사 온 건 초등학교 2학년 봄이었다. 고향에 살 땐 바다로 조개 캐러 간 엄마랑 이모들 대신 외사촌 동생들과 놀아주면서 외할머니를 도왔다. 보리밥도 하고 감자도 삶곤 했었는데, 서울로 이사 온 후로는 방학 때만 갈 수 있었다. 엄마네 형제는 십 남매인 대가족이라 명절 때마다 모이면 잔칫집처럼 북적북적했다. 외할머니는 구정 전, 섣달그믐엔 커다란 도마를 마당에 꺼내놓으셨다. 외삼촌이랑 이모부들이 돌아가면서 사람 머리통만큼 큰 나무망치로 한참 동안 떡 반죽을 쳐댔다. 할머니는 반죽을 조물조물 만져보고, 마음에 들만치 쫀쫀해지면 떡가래를 길게 손으로 잡아당기며 숭덩숭덩 썰어댔다.

 

 

할머니의 도마 옆에는 노오란 콩가루가 담긴 커다란 쟁반이 놓여있고, 나는 쟁반 위로 뚝뚝 떨어지는 떡 덩어리들을 손가락으로 꼭꼭 눌러가며 네모난 인절미를 만들었다. 첫 번째 떡은 내 차지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 한 덩이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어 먹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그때마다 외할머니는 활짝 웃으며 천천히 먹으라고 등을 두드려 주셨다. 막내 이모는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한 바가지를 할머니의 도마 위에 두고 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맛있는 음식이 참 많은데 왜 그렇게 인절미만 욕심껏 먹었었는지 그저 웃음이 난다. 인절미 만드는 저녁은 떡 한 덩이 먹고, 동치미 한 모금 들이키기를 반복하다가 배가 터질 지경이 되어 저녁밥은 먹지 못했다. 외할머니의 커다란 도마는 잔칫날에도, 제삿날에도 마당에 나오곤 했다. 때로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모인 적도 있었다. 그런 날엔 삶은 돼지고기가 올라오고, 김장철엔 무와 당근, 양파도 올라오고, 그 큰 도마 위에서 외할머니의 손이 평생 바쁘셨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칼질하며 들려주셨던 외할머니의 말이 생각난다.

 

“생긴 대로 사는 게 제일이여. 봐라. 써먹을 수 있어야 이렇게 칼질을 안 당하지, 못 써먹게 생기면 칼질해서 다듬어야 한단 말이여. 그럼 얼마나 아프겠어?”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할머니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재미있어 깔깔거리고 웃기만 했었다. 살면서 힘들고 괴로울 때면 가끔 외할머니의 말씀이 떠오를 때가 있다. 너무 많이 욕심내기보다는 적당히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할 때, 외할머니께서 도마 앞에서 해주셨던 그 말이 나의 삶의 철학이 되었다. “할머니 저 이만하면 쓸만하죠? 할머니 덕분이예요.”

 


 

▲ 윤미라(라떼)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스토리문학 계간지 시 부문 등단
안산여성문학회 회원
시니어 극단 울림 대표
안산연극협회 이사
극단 유혹 회원
단원FM-그녀들의 주책쌀롱 VJ

 

[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