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체류 말기에서 공동체가 시작된다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경북의 한 농촌. 비닐하우스 옆의 임시 거처, 좁은 컨테이너 안에 아이 셋을 키우는 부부. 남편은 불법체류자였다. 아내는 비자 기한이 끝났고, 막내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아이는 이 나라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의 이름은 '김유진'이었다. 어머니가 한국 이름으로 지었다. 하지만 학교는 그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서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겐 출생증명서가 없었고, 부모에겐 체류자격이 없었다. 나는 그날 한 가지를 똑똑히 깨달았다. "이 나라는, 종이 없으면 사람도 없다고 여긴다." 불법체류자. 이 단어는 너무 쉽게 말해진다. 그러나 이 말은 문법적으로 틀렸다. '체류'는 행위이고, '불법'은 규정이다. 그 둘을 붙이면, 사람 전체가 불법이 된다. 법은 사람을 규정해야 하지만, 이제는 사람이 법의 잉여가 되었다. 그는 살아 있고, 일하고 있고, 이웃과 인사를 나누지만, 그는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묻고 싶다. "불법체류가 끝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가 자진출국하면 끝인가? 강제추방되면 끝인가? 아니다. 그가 이 땅에 삶을 남기고 간 이상, 그는 여전히 이 사
제4화 고향을 선택한 사람들 나는 한 외국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이었다. 한국에 온 지 7년, 처음에는 경기도 화성의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했다. 그 뒤 경북 영천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수도권을 떠났습니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살 만하더라고요." 그 짧은 문장은 내 사고를 흔들었다. 지방은 살 만한 곳인가? 아니, 우리에게 '살 만하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집값? 일자리? 학군? 교통? 우리는 너무 오래 이 기준들 속에 살며, 정작 '살다'라는 말이 어디서, 누구와, 어떤 관계로 사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임을 잊었다. 그는 영천에 뿌리를 내렸다. 아내와 함께 왔다. 딸은 중학교에 다녔고, 아들은 한국어를 배웠다. 이웃은 처음엔 낯설어했지만, 두 해쯤 지나자 "그 집은 착하더라"는 말이 돌았다. 그러자 동네는 그 가족을 받아들였다. 그는 고향을 선택한 것이었다. 국가가 고향을 정해주지 않았고, 정치가 안내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기 생애에서, 한 장소를 '살 집'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법은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체류 중'이었고, 아내는 '취업 불허'였
제3화 비자에도 계급이 있다 그날 나는, 같은 민족의 얼굴을 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비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다. 한 명은 F-4, 다른 한 명은 F-4-R. 표면상 둘 다 '재외동포 비자'라 불린다. 하지만 정작 그 둘 사이엔 삶의 자격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문지방이 놓여 있었다. F-4 비자는 재외동포에게 주어진다. 대한민국 밖에서 살았던 우리 핏줄. 하지만 이 비자는 단순노무직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자격은 있지만, 손을 더럽혀선 안 된다. 말하자면, 일하되, 특정한 방식으로만 일하라는 비자다. 한편, F-4-R. 지역특화형 비자다. 국가는 일부 '인구감소지역'에게 이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해당 지역에 사는 외국국적동포에게, 단순노무 포함 모든 취업을 허락하겠다." 그러나 이 비자는 단서가 붙는다. "그 대신, 그 사람은 지역에만 있어야 한다." 그는 노동의 권리를 갖지만,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다. 나는 이 구조를 비자의 봉건제도라 부른다. 조선시대 양반이 말을 타고, 상민은 걸어서 가던 시대처럼. 지금 한국의 이주정책에도 사람을 나누는 계급의 언어가 존재한다. F-4는 능력의 이름으로, F-4-R은 지방의 구인난이라는 사유로,
제2화 머물기인가, 체류하기인가 그는 이곳에 있다. 일을 한다. 세금을 낸다.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다. 이 나라의 법은 그를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다. 그는 체류자다. 머무는 자. 잠시 들른 자.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자. 국가가 그에게 부여한 이름이다.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숨겨진 명령문을 본 듯했다. "너는 이 땅에 정들지 마라." "너는 이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너는 떠날 것이다." 한국은 수많은 외국인에게 거주의 사실은 허락하면서, 거주의 권리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 차이를 나는 20년간 연구하고, 현장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언젠가 비극의 구조가 된다. 2024년 봄, 영천의 고려인 마을. 그곳은 이미 하나의 '이주공동체'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어머니들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간다. 남편은 일터로, 아내는 시장으로 간다. 하루가 흐르고, 계절이 바뀐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하나의 허구 위에 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내, 그들의 어머니, 즉 'F-1-9R 비자'를 가진 가족들은 '일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안 돼요. 그래서 떠나요. 그냥
제1화 뜻밖의 나라 그들은 사라졌다. 아니, 더 냉정히 말하자면 그들은 '없어졌다'. 통계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들. 숫자는 점처럼 찍혔다가, 누군가의 무관심 속에 증발해버린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소멸'인가? 아니다. 그것은 방치다. 정책적 방치, 행정적 유기, 사회적 망각이다. 내가 처음 그 비극을 목격한 것은 삼 년 전 인구 흐름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어느 밤이었다. 지도 위 생명들이 꺼지듯 흩어지는 광경은 마치 이 땅이 서서히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더 두려운 것은 죽음 앞에서 우리가 지껄이는 헛된 변명들이다. "출산율이 낮아서 그렇다." "도시가 더 편해서 그렇다." "지방은 경쟁력이 없어서 그렇다." 허튼소리. 이런 말들은 진실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양심과의 비열한 타협이다. 기억에서 도망치기 위한 구차한 면죄부다. 그리고 그 사이, 우리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잊었다. "우리는 누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그렇다. 우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곳에 살아도 되는지, 여기서 아이를 낳아도 되는지, 지역을 고향이라 불러도 되는지를 묻지도, 허락하지도 않았다. 마치 권리인 양 그들의 존재 자
1. <프롤로그> 새로운 정부와 지역의 반란을 위한 이주 사회 디자인 2025년 6월 3일,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한다. 윤석열 정부의 붕괴와 친위적 정치권력의 몰락 이후, 이 나라는 새로운 국가 설계에 관한 질문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국가의 가장 근본 단위인 ‘사람’을, 그중에서도 떠나온 사람, 남겨진 사람,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람에 대해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방은 사라지고 있다. 인구는 줄지 않는다. 증발하고 있다. 지방의 대학은 학생이 없고, 병원은 의사가 없다. 공장은 사람을 구하지 못하고, 시장은 외국인 노동자 없이 열릴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현실 앞에서 대한민국의 법과 정책은 여전히 묻는다. “3년 체류인가, 5년 체류인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살 것인가, 함께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이 칼럼 시리즈 ‘우리는 누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는 정책보고서가 아닌 정치철학적 선언문, 통계가 아닌 언어로 쓴 생존기, 비자가 아닌 정주공동체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글쓰기이다. 이 시리즈는 경북연구원 류형철 박사가 집필한 『광역비자 도입 실효적 추진 방안』(2025.2, 300쪽)의
『우리는 누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로 시작하는 이 칼럼 시리즈는 지방의 인구 위기와 이주 정책이라는 문제를 단순한 숫자나 제도적 해석을 넘어, 삶의 맥락과 공동체의 윤리에서 다시 묻는 류형철 박사의 기획 칼럼 시리즈이다. 총 30편이 넘는 본 시리즈는 ‘이주 사회 디자인’을 주제로, 광역비자·정주 지원·이민 거버넌스의 문제를 한국 사회와 지방 정부의 현장에서 풀어낸다. “제도가 아니라 사람을. 비자가 아니라 정주를. 체류가 아니라 공동체를"이 칼럼은 그 모순을 넘어 공존의 사회설계를 제안합니다. [편집자 주] 시리즈 제목은 아래와 같다. Part 1. 메인 시리즈: 『우리는 누구를 받아들였는가』 (001–022) 〈프롤로그〉 새로운 정부와 지역의 반란을 위한 이주 사회 디자인 제1화 뜻밖의 나라 제2화 머물기인가, 체류하기인가 제3화 비자에도 계급이 있다 제4화 고향을 선택한 사람들 제5화 체류 말기에서 공동체가 시작된다 제6화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 제7화 지역은 비자를 발급할 수 있는가? 제8화 우리는 누구를 기반으로 했는가 제9화 정책은 여전히 혼자다 제10화 ‘정주’라는 단어는 누구의 것이었는가
회복력의 다른 이름은 일상이다 특별한 날은 인생을 바꾸지만, 평범한 날은 인생을 지탱한다. 사람들은 흔히 회복이라는 단어를 듣고 ‘이전보다 더 나아지는 상태’를 떠올린다. 위기를 기회로, 상처를 성숙으로, 무너짐을 비약으로 바꾸는 것. 하지만 실제 삶에서의 회복은 그보다 훨씬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때로는 너무 평범해서 대단하지 않게 보이기까지 한다. 병을 앓고 난 뒤의 완치는 통증 없는 하루를 맞이하는 것이고, 큰 상실을 겪은 사람의 회복은 단지 다시 아침에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약속한 시간에 어딘가에 도착하는 능력을 되찾는 것이다. 위로라는 말이 무력하게 느껴질 만큼 지쳐 있던 날들 속에서도, 그날을 그냥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우리가 견딘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회복력이라는 말이 자주 회자된다. 회복탄력성이라는 단어는 이제 심리학을 넘어 교육, 경영, 심지어 자기계발서 속에서도 흔히 쓰이는 개념이 되었다. 어떤 실패에도 꺾이지 않고, 어떤 상처에도 다시 일어나고, 심지어 이전보다 더 나아지라고. 하지만 그 회복이라는 개념이 때로는 너무 낙관적으로 소비되는 느낌도 든다. 마치 우리는 반드시 어떤 상실을 발판 삼아 더 단단해져야
소풍, 서울로 가보실래요? 서울로 소풍을 다녀왔습니다. KBS 라디오 방송 녹화를 위해 대구에서 서울을 방문하게 되신 스승님을 뵙기 위해서입니다. 지난해부터 시작한 글쓰기를 지도해주시는 교수님에게는 저처럼 작가가 되고 싶은 제자들이 전국에 많이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부터 컴퓨터만 있으면 가능한 줌 수업이 활성화되면서 서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사람들도 일대일 매칭 수업이 편해졌기 때문이죠. 지난주 수업 시간에 스승님의 서울 방문을 알게 되었고, 저는 그동안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저녁밥을 사드리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스승님께서는 저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셨고,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다른 제자 두 분도 마침 시간이 되어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서울에서 네 사람의 약속이 정해졌습니다. 평일 저녁, 3시간의 번개모임, 어쩌면 짧은 시간일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만남에 대한 기대감으로 소풍 전날처럼 모두가 설레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소중한 시간에 어디서 무엇을 함께 할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몇 년 전, 국민학교 단짝이었던 친구들과 개나리가 활짝 피었던 봄날 만났던 일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작은 변화에 반응할 줄 아는 마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누군가 놓고 간 젖은 양산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벽에 기댄 채 천천히 마르고 있는 그것은 마치 계절이 바뀌었다는 조용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며칠 전부터 커피가 덜 따뜻하게 느껴졌고, 출근길 셔츠 소매가 반으로 접히기 시작했다. 나무는 훨씬 짙어졌고, 퇴근길에는 바람보다 아스팔트의 온도가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생각했다. 아, 계절이 바뀌고 있었구나. 우리는 대부분 어떤 변화가 이미 한참 진행된 뒤에야 그것을 인지한다. 나무는 어느새 잎을 틔웠고, 해는 늦게까지 지지 않으며, 밤의 공기는 한결 가벼워진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는 그 모든 변화가 배경처럼 흐려진다. 사소한 징후들이 실은 삶의 리듬을 이끄는 전조였다는 걸 우리는 뒤늦게 깨닫는다. 그렇기에 계절을 먼저 감지하는 사람은, 어쩌면 아직도 살아 있는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른이 된다는 건 종종 감각을 잃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계절의 결을 정확히 기억한다. 새 학기 교실의 공기, 여름 장마의 냄새, 선풍기 옆에 길게 누워 있던 오후의 소리. 그러나 이제는 ‘덥다’, ‘춥다’ 같은 기능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