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의 좌충우돌 인생 3막

 


 

비가 온다. 여름의 끝자락에 내리는 비. 가을을 기다리는 마지막 땀방울이다. 30도가 넘는 한낮의 더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식혀 주니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 모르겠다. 귓전을 간지럽히는 수많은 빗방울이 땅바닥을 튕기는 소리는 왠지 모를 편안함을 준다. 일상에 지친 내게 잠시 쉬어 가라는 듯, 세상과 나 사이에 얇은 커튼을 쳐 주는 것 같다. 따듯한 차 한잔을 준비하고 소파에 몸을 기대어 본다. 향기로운 생강차 한 모금에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았다. 빗방울 커튼 사이로 어른거리는 창밖의 풍경은 나를 아련한 기억 속 그날, 그곳으로 이끌었다.

 

첫 직장을 다니며 3개월째 접어든 꽃다운 나의 스무 살, 그 시절, 나는 참 행복했었다. 비록 월세로 지내는 단칸방에서 엄마와 둘 뿐이었지만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원래는 부모님과 두 동생까지 다섯 식구였지만,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엄마는 아빠와 이혼했고, 몇 년 후에 아빠와 살던 집에서 가출한 나는 외할머니를 졸라 엄마를 만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를 독차지할 수 있었고, 우리는 무척 애틋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엄마와 나는 같은 회사에 있는 생산부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밤이나 낮이나 우린 참 많이 얘기하고 참 많이 웃었다. 그리고 퇴근할 때마다 손을 꼭 잡고 시장에 들렀다가 오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와 계란말이로 차려진 저녁 밥상 위엔 언제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엄마와 딸이 활짝 웃는 행복한 장면은 딱 우리 모녀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사라졌다. 그날도 비가 왔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갑작스럽게 맞이한 엄마와의 이별을 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회사에조차 아무 통보를 안 했으니 무단결근이었고, 주변 사람들은 ‘금방 돌아오겠지’라며 위로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엄마의 가출은 처음도 아니었으며 금방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말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이유를 알면 조금 덜 속상할 텐데, 엄마의 느닷없는 가출은 나를 답답하게 했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풀 수 없는 수학 문제처럼 어려웠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록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계추처럼 아무 감정 없이 회사만 왔다 갔다 하면서 엄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마음속 깊은 곳엔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만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비는 왜 그렇게 자주 내렸는지, 지금처럼 여름의 끝자락, 장마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석 달째 접어들면서 나는 더 이상 엄마를 기다리지 않았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고, 잃어버린 말을 찾았다. 가끔은 퇴근길에 친구 집에 들러 놀다 오기도 했는데 그날은 친구네에서 저녁을 먹고 느지막이 돌아온 날이었다. 집에 엄마가 와 있었다. 청소했는지 방이 훤했고, 계란말이와 된장찌개가 밥상 위에 놓여 있었다. 엄마 옆에는 웬 아저씨가 신문을 들고 앉아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엄마는 나와 단둘이 살기 전에 이미 재혼한 상태였다고 했다. 아빠와 잘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혼한 엄마를 갑자기 찾아온 내가 가여워서 그 사실을 말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아저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가 직장에 적응하는 몇 달 동안 나와 지냈던 것이라고, ‘그럼, 말을 하지 그랬어?’ 울음 섞인 투정에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 후로도 엄마와 나는 수없이 오해하고 답답해하고, 그러다가도 이야기해서 풀고, 미안해하고를 반복했다. 지금은 80세를 몇 년 앞둔 할머니가 되셔서 아픈 곳도 많고 늙으셨지만, 여전히 엄마는 차분하고 지루한 나와는 다르게 열정적이고 화끈하시다. 모든 엄마가 그렇듯이 삼 남매에 대한 걱정으로 늘 마음이 심란하시다.

 

나는 아직도 기다리며 살고 있다. 엄마의 아픈 곳이 빨리 나아지기를, 엄마의 모든 걱정이 해결되고 행복한 날이 빨리 오기를 말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은 언제 그칠지 모르는 비를 바라보는 마음과 많이 닮았다. 오늘처럼 종일 비가 내리는 날엔, 그때 그 시절 엄마를 기다리던 내 마음속에 내렸던 슬픈 기다림의 눈물이 생각나 씁쓸하고 아리다. 남은 생강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창문을 열었다. 요란한 빗소리가 마음 안으로 들이친다. 비는 예측할 수 없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언제 올지, 언제 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비를 바라보는 마음처럼 오면 오는 대로, 그치면 그치는 대로, 매 순간마다 내가 즐길 수 있는 것에 집중해보자. 기다림에 집착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면 참 좋을 것 같다.

 

 


 

 

 

 

[대한민국경제신문]